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빛으로 바뀐다. (창 1:1-5) 3월 1일
코로나19로 인한 총회 대응지침에 따라 1일,8일 예배가 온라인 예배(주일 11시)로 대체됨에 따라 설교문을 올려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문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현재 코로나 19로 인하여 극한 어려움과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를 믿음으로 그리고 지혜로 함께 극복하여 나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그리고 물질적인 고통이 없도록 더욱 기도하겠습니다.
하루 빨리 얼굴과 얼굴을 대하고 함께 본당에서 예배드리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월달부터 말씀상고 대행진이 시작됩니다. 3-5월까지 말씀을 깊이 보는 시간으로 삼고자 합니다.
3월은 창세기 4월은 출애굽기 5월은 신명기를 집중하여 읽으시면 됩니다. 이번 주는 창세기 1-10장까지를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창세기 1- 10장까지는 창조의 사건, 인간의 타락, 노아의 홍수 그리고 노아 이야기까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위대함과 존엄함 그리고 타락한 인간의 현실, 그리고 회복을 위한 첫 방주 사건이 들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늘은 창조가 말하는 삶의 메시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창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많은 과학자나 발명가들이 창조를 이야기하지만 모두가 창조안에서의 발견이고 모방일 뿐입니다. 과학에서 말하는 빅뱅설이나 진화론등은 모두 창조된 세계 안에서의 새로운 발견들이고 그 이론을 세우기 위해 가설을 근거로 발전한 것임을 지식인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추론과 가설로 시작된 지점도 믿는 것으로 시작되었다면 우리는 분명하게 세상의 모든 이치와 원리를 천지 창조로 믿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인간 존중적 자세이고 자연친화적인 믿음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인 1장 1절은 이렇게 선언하고 계십니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설명이 2절부터 2장 3절까지 자세히 나왔습니다. 그런데 2절은 창조의 이유를 설명하시고 계시는 구절입니다. 창조의 이유는 바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정리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2절의 땅은 우주적인 공간을 의미합니다. 창조전에 우주적인 공간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창조가 시작될 때 해와 달과 별들과 하늘과 육지가 나타나기 전에 창조의 원리로 빛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 빛은 모든 생물의 필요불가결한 원동력이고 우주를 온전하게 움직이는 진리이고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생기인 것입니다. 즉 우주 만물과 사람은 빛을 보아야 하고 빛으로 살아야 하고 빛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 살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경험한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행26:13 왕이여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진리 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해보다 더 밝은 경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창조의 가장 큰 원리는 ‘식물이 생겼다.’, ‘동물이 형성되었다.’, ‘인간이 창조되었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빛이 생성된 것입니다.
빛이 왜 창조되었습니까? 빛이 왜 중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2절에 나오는데 혼돈과 공허와 흑암 때문입니다.
1) 2절에 나오는 혼돈은 히브리어로 토후인데 형태가 없는 무질서를 의미한다면
2) 공허라고 쓰인 히브리어 보후는 텅 비어있는 상태를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3)흑암이라고 쓰인 단어 호셰크는 원시 지구를 덮고 있던 최초의 어두움이며 태초의 흑암을 말하는 것입니다.
설명하자면 우리의 삶의 펼쳐지는 두려움과 공포는 혼돈의 상태에서 기인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외로움과 고독과 삶의 무의미함을 느끼는 것은 보후. 즉 공허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삶에 펼쳐지는 질병과 죽음과 죄악은 흑암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질병은 두려움과 공포를 동반합니다. 그리고 곧 외로움과 공허함을 가져다줍니다. 그렇게 인간의 생명은 기운을 잃고 약해져 가는 것을 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극한 고통을 가져온 코로나 19는 질병의 아픔만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과 공포를 가져다 줄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무질서하게 만듭니다. 존중이 사라지고 서로 원망하게 합니다. 배려가 사라지고 극단의 이기심이 작동을 합니다. 한마디로 사회적인 안전라인을 넘게 되면 비방과 폭력과 방화와 더 나아가서는 살해가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역사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혼란과 개인의 질병을 겪을 때마다 육체적인 고통과 더불어 영혼의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슬프고 고독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을 살 길로 초대합니다. 생명의 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과 개인의 삶 속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펼쳐질 때에 빛이 들어오면 살 줄로 믿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시므온이라하는 경건한 노인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찬양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눅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