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다_마2:1-6_1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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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다_마2:1-6_12월 6일

성문Shalom 0 2939 0


우리 교회는 지난 3개월간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자세히 읽어가며 성경 상고행진을 했습니다. 또한 성경 필사도 진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보려고 노력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이러스의 인간 공격이 진행되는 가운데 2가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1) 코로나 19의 확산을 막아보려는 싸움을 합니다.

백신을 만들고 마스크를 쓰고 거리두기를 하면서 바이러스를 이겨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2) 인간의 문명이 퇴보되려는 것을 막아보려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침체되고 민주주의의 가치가 훼손이 되고 국가 간의 교류가 차단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가치 문화, 시스템이 흔들리고 만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생명, 재산, 가정, 모임 등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이러한 시간을 보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무엇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인가?

사람들은 어떤 원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가?

- 나라, 정부 정책, 방침이 우리 삶을 다스리는가? 2020년에 펼쳐지는 시대 흐름과 시대정신이 나의 생각과 나의 언어를 현재 지배하고 있는가?

일제 강점기 때는 독립운동으로, 해방 후는 공산주의 민주주의 사상운동으로, 6·25후에는 경제 부흥 운동으로, 군부독재시대에는 민주화 운동으로 그리고 민주화를 이룬 다음에는 이 이룬 공적을 가지고 논공행상으로 그리고 이제는 또 다시 새로운 패러다임의 이념논쟁으로 사회가 늘 시끄럽습니다. 지금의 시대정신이 현재의 나를 다스리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 아니면 내가 살아온 지난날의 좋은 인식과 경험이 지금의 나를 다스리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과거에 읽은 책, 좋은 강연, 좋은 선생님을 통한 삶의 방식이 현재의 나를 이끌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그래서 늘 나는 맞고, 내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살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왜 갈등이 일어나나요? 왜 싸움이 극렬해지나요?

그것은 나를 지배하는 정신적인 구조나 가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부부가 갈라서는 것도 자식이 부모를 버리는 것도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 원수가 되는 것도 다스리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루에도 만 가지 생각을 하고 아침과 저녁에도 생각이 수십 번씩 변하는 무궁무진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삶의 평화란 가능한 것입니까?

일관되고 믿을만한 모습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불가능한 것입니다.

- 시대정신을 가지고 살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소리를 하고 삽니다.

위선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게들 되는 것입니다.

-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고 살면 가깝게는 가정에서 그리고 멀리는 주변 사람들과 늘 갈등하고 싸우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그렇게 소란스럽고 요동을 치면서 살기에 우리는 늘 피곤하고 중병에 들고 고통을 주고 고통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에 우리를 다스리시는 영원하고 일관된 그리고 변함이 없는 가치를 붙잡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종교성이고 영혼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갈망인 것입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그리고 항상 옳은 적이 없기에 전쟁과 폭력과 잔인함이 이어지는 것인데 이것을 끊고 평화와 안식을 선물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갈망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맞물리는 그곳에 예수님의 탄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의 여정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2번째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고대하는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인간의 권력, 인간의 가치, 시대정신이 사람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제사법과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을 훈련하셨습니다. 거기서 안식을 누리고 평화를 말하고 회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나라와 그 통치는 더 강해졌고 동시에 사람들의 신음소리과 고통은 더 커져갔습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로마. 더 큰 제국들은 인간의 욕망의 표현이었고 평화는 단지 힘에 의한 침묵뿐이었던 것입니다.

 

인간 역사의 어둠이 깊어져 갈 때 하나님께서 인간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로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시작된 것입니다.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심으로 영원하고 일관되고 변함이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우리의 삶을 이끄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모든 질서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를 꿈꾸고 이루며 우리 가정과 교회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로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다스리심의 법칙을 두 가지만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의 다스리심의 첫 번째는 오신 방식이었습니다.

작은 마을을 택하시고 그곳에 임하셨다는 평등의 법칙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메시야 별을 찾아 헤롯 왕을 찾아오고 예루살렘 수도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탄생은 작은 마을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큰 자, 작은 자, 높은 자, 낮은 자를 가리시지 않으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질서를 위해 높낮이를 만듭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로 가릅니다. 배운 자와 못 배운 자로 줄을 세웁니다. 이 땅의 질서 상 어쩔 수 없는 이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존재자체를 부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시하고 하대하고 억압하고 함부로 대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보면 그 어느 것 하나 한을 품고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시냇물은 강들과 이어지고 바다로 이어집니다. 꽃씨들은 바람을 타고 높은 산 낮은 산 그리고 멀리 바다가운데 있는 무인도에도 날아가서 꽃을 피웁니다. 알고 있는 꽃들과 이름 없이 홀로 핀 꽃들로 하나같이 아름답고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산도 들도 바다도 나무도 풀들도 갈라서지 않습니다. 모두 그 자리에서 소중하고 아름답게 서로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화려한 도시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높은 자리에 왕관을 쓰고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무명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 그것도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는 다 존귀하고 동등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모두를 차별하시지 않고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인생의 위로가 있고 안식이 있고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나라가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내 마음을 통치하시길 원합니다. 상대방을 하대하거나 함부로 말하거나 극단적인 비난을 멈추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원수라 할지라도 마음으로는 친한 사람과 동등하게 대하려고 나 자신을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방식으로. 우리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 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병자들, 비난받는 사람들, 악한 자들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기 위해서요?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상대방이 회개하면 비로소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와 저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번 2020년 성탄절은 지난 6·25전쟁 때 빼놓고 가장 힘들고 환경의 제한을 받는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더욱 병들고 상하고 소외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길거리 폐지 줍는 어르신들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직장 없이 아르바이트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잠시라도 주변을 돌아보시고 평등하게 소중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살펴주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삶속으로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악한 자 나쁜 자 원수 같은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시고 돌이키는 일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성탄절을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다스리심의 법칙 두 번째는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죽으시는 희생과 살아나시는 소망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작정 희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기 위해 십자가 죽음을 택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남을 먼저 희생시키기를 원합니다. 다음으로는 희생의 자리에서 도망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희생하게 되면 소망도 없이 도살장의 끌려가는 소처럼 그렇게 소리지르고 주변을 다 망가뜨리고 희생의 자리에 들어갑니다.

교회 봉사일 하나 맡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로 하긴 하지만 죽기만큼 싫다는 것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고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변을 힘들게 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가정에서도 엄마가 희생하는 것은 정말 힘든 것입니다. 죽기만큼 싫으면 아기는 못 키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희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살리시기 위해, 구원하시기 위해 희생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시기 위해 희생하신 것입니다.

20: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 에 살아나리라

 

존 레녹스가 쓴 책 <코로나 바이러스 세상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 라는 책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루게릭 병을 잃고 있는 분이 고백을 합니다. 나는 마침내 베이스캠프를 떠나 오르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에베레스트를 선택하셨다. 결코 쉽지 않았고 종종 미끌어졌으며 일부 구간은 너무 가파르고 감당할 수 없었지만 주님은 나에게 능력과 힘을 계속 공급하셨다. 내가 피곤할 때 거기 계셨다. 내 등반은 거의 끝났다. 이제 산의 정상이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다. 등반가가 정상에 더 가까워지면 숨을 쉬기가 어려워진다. 고도가 높을수록 산소량이 줄어들고 고산병이 시달린다. 그러나 나는 강행해야 한다. 내가 등반을 마쳤을 때 나를 기다리는 보상이 그 어떤 희생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희생은 남을 구원하기 위함이고 살아나기 위함입니다. 부활의 영광이 삶에 덮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

비로소 하나님이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부활과 영광의 나라인 것입니다.

 

꽃들도 라는 찬양을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1. 이곳에 생명 샘 솟아나 눈물 골짝 지나갈 때에

머잖아 열매 맺히고 웃음소리 넘쳐나리라

2. 그 날에 하늘이 열리고 모든 이가 보게 되리라

마침내 꽃들이 피고 영광의 주가 오시리라

 

후렴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다도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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