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요한복음 9: 1-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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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요한복음 9: 1-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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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2017년 10월 15일

본문 : 요한복음 9: 1-12절

 

요새 유가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유가가 많이 올라가면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는데 우리나라의 교통 사고율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이유인 즉은 차가 줄어들면서 주행속도가 올라가다보니까 큰 사고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큰 교통사고가 나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하여 세 종류의 차가 오게 됩니다. 

1) 경찰 차, 즉 112번호의 주인공들이 옵니다. 

이들의 관심은 현장보존과 누가 잘못했는지에 대해서 살피는 것입니다 

잘잘못을 가려주어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려줍니다 스프레이를 뿌리고 사진을 찍고 사고자를 가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즉 죄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2) 번개같이 달려오는 차가 있는데 레카차입니다 

어디서 알았는지 번개같이 와서 차를 견인하고 돈을 챙깁니다

물론 현장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사실은 그 사고속에서 자신의 이득이 목적입니다

 

3) 나타나는 차는 119 번호의 주인공, 구급차입니다. 

이들은 달려와서 사고당한 사람들을 챙깁니다 

치료하고 위로해주고 병원으로 데려갑니다 

누가 잘못했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환자가 우선입니다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는지만을 생각합니다. 즉 살리는데 목적을 둡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히 여러 종류의 사람을 봅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 112같은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사람, 레카차같은 사람입니다 

이타적인 사람, 119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삶을 면면히 살피면 대부분 생각이나 삶의 방식이 이기적입니다 또는 괜찮다하는 분들도 보면 대개는 의식과 삶의 방식이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자리가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타적인 사람은 정말 보기 힘듭니다

 

보통 문제가 생기거나 어려움이 닥치거나 불행한 일이 닥치면 이타적이지 못합니다 처음은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생각을 하지만 대부분 이기적으로 변해버립니다 점차 살기위해 독해지고 어느 경우에는 양심도 의리도 다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불행을 스스로 자초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특히 요새 전쟁의 공포중에 경제가 어렵고 먹고 살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서민들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무척이나 비관적이 됩니다 답답하고 한스럽기도 합니다 그리고 눈을 떠서 잘잘못을 따집니다 

 

1)개인적인 삶의 관점에서 봅니다 

건강이 나쁘거나 사고가 나면 비관적이 됩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혹시 하나님이 나를 벌주시려고...나를 버리시나보다.... 쉽게 판단합니다 좌절합니다 

 

2) 사회구조적인 관점으로 봅니다

누구의 죄냐? 물론 부자들의 죄입니다 정치인들의 죄입니다 구조적인 죄입니다 그리고 부모 잘못만난 죄입니다 또 시대를 잘못타고 난 죄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잘잘못을 가리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주로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119와 같은 세계입니다 

무조건으로 도움을 주는, 흘러 내려보내주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잘하고 못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선 공기가 그렇습니다 무제한 공급을 합니다 

물이 그렇습니다 바다의 물고기들이 그렇습니다 

땅이 그렇습니다 하늘의 세계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나의 잘못에 대한 정죄도 판단도 공격도 없습니다 그저 흘러내리고 감싸주고 일으키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날때부터 시각장애인인 한 사람을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가지고 묻습니다 

2절에 나옵니다 요9: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즉 그런 불행을 타고난 운명적인 죄입니까? 

아님 부모의 죄로 인한 환경적인 죄입니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고가 나고 불행이 닥치고 억울한 일이 생기면 내 죄 때문이라고 자책하시지는 않습니까? 

아님 환경때문이라고, 저 사람때문이라고 원망을 주로 하시지 않습니까? 

왜 우리 집은 이런가? 왜 나는 이런가? 왜 나의 자녀는 이런가? 비관하고 절망으로 음식을 삼지는 않으십니까?

 

당시 유대교인들은 불행을 당한 이런 사람들에 대해 두 가지 이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태어난 신생아 자신의 죄 때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의 충동이 태아 형성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인간의 재난이 그 부모의 죄로 인함이라고 하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해석의 말씀을 하십니다 

3절에 요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즉 그의 미래를 열어놓으시는 말씀입니다 

운명론적으로 심판하듯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도 미래가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에게 다가가셔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신 후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시각장애인이 실로암 못으로 갑니다 

7절에 보면 요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갑자기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안보이던 세계가 열리고 답답하게 듣기만 하던 세계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각장애인은 다른 세상을 살게 된 것입니다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변한 것은 없습니다 집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옷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신분이 상승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에게 가치의 변화가 왔습니다 인식의 변화가 온 것입니다 삶의 방식이 변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제는 구걸하던 삶에서 보고 가르치는 삶으로 변한 것입니다 

30절에서 33절에 보면 그는 이제 가르칩니다 

요9: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하나님의 일을 몸소 체험했음으로 인해 예수님을 소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를 누르고 정죄하려는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정죄도 어떤 비난도 이제 그의 삶을 그의 눈을 어둡게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5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그렇습니다 그의 마음에, 그의 눈에 예수님이 있게 되자 그는 빛을 보았고 빛을 경험했고 환해진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이 정죄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해같이 밝은 삶을 사시는 기적이 체험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인생이 열리고 빛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려면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나에게서 시작되어야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는 체험이 있어야합니다 3절에 보면 요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즉 우리속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시작되는 것을 경험해야합니다 

 

그렇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고 정죄당하고 비난당하기에 합당하지만 너는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세상사람도 귀신도 마귀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고 우리를 누르지 못합니다 우리를 열등하게 만들고 가치없게 만드는 세속의 순서가, 그 가치치계가 더 이상 내 영혼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 자체가 소중하고 귀하며 나의 이 모습 이대로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부족합니다 가난합니다 나이가 들었습니다 초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것도 감사하지만 앞으로도 이 초라한 나를 통해 하나님 영광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내 동댕이쳐진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도 기억못하는 잊혀진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나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중에 기도중에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그 뜻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에 일어섬이 있고 위로가 있고 승리가 있는 체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우리의 눈이 떠집니다 

바로 이때 이 세상의 가치보다 더 귀한 영적인 세계, 구속의 세계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죽어도 사는 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눈이 떠지는 실로암의 체험입니다 

예배는 실로암 연못입니다 말씀은 실로암 연못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배중에 기도중에 세속의 눈을 주님의 말씀으로 씻어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씻어내야합니다 

원망과 공격과 비판과 정죄의 눈을, 절망과 좌절과 실망과 포기의 눈을 씻어내야하는 것입니다 계속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나의 삶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119차가 달려오듯이 나를 향해 오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길기도합니다 요 9:3.....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시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임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둘째는 보게 되는 은혜, 영안이 열리지는 체험, 빛을 발하는 삶은 순종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7절에 요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라고 하였습니다.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고치시는 방법이 다양함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손을 대시므로'(마20:34). 또는 '말씀으로'(막10:46), '먼 곳에서 말씀하심으로'(요4:50) 치료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 바르시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각장애인을 만난 현장에서 말씀 한마디로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실 수도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 시각장애인에게 최소한의 순종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인데 예루살렘 성전 남쪽에 있는 연못으로 길이 16m, 넓이 6m, 깊이 6m의 연못이었습니다. 

실로암은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 산헤립의 공격에 대비해 예루살렘 성읍에 충분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 성밖의 '기혼샘'(처녀의 우물)에서부터 약 530m 떨어진 실로암까지 암반을 뚫어 터널을 파서 물을 공급받도록 하였습니다(대하32:30). 

그곳에서 물을 보내어 실로암 못에 왔기에 보냄을 받았다는 뜻인 실로암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천천히 흐르는 실로암 물'(사8:6)도 바로 이 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이 자신의 눈에 침을 섞은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으로 가서 씻으라는 말을 듣고 그는 순종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다급해서도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살수도 있었습니다 눈감고 다니는 것이 편하기도 하고 새로운 변화가 오는 것이 반갑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걸어갑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님의 호흡과 그 따듯한 손길과 마주선 그 느낌이 그를 실로암으로 걸어가게 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잠시의 시간이지만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습니다 그리고 순종하게 됩니다 

걸어갑니다 그런데 가서 씻은 결과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경은 7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명령에 아무런 이유도 달지 않고 작은 순종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순종은 고통과 조롱과 구걸의 삶을 끝장내고 말았습니다. 

그의 순종은 영광스러운 빛과 자유를 얻게 하였습니다. 

그의 순종은 불만족의 삶을 만족의 삶으로 전환시켰습니다. 

그의 순종은 통곡의 삶을 희열의 삶으로 전환시켰습니다. 

그의 순종은 패배의 삶을 승리의 삶으로 전환시켰습니다. 

그의 순종은 어두움의 생활을 청산하고 광명의 생활을 얻게 하였습니다. 

그의 순종은 구걸의 삶을 버리고 이제는 주는 삶, 하나님의 섭리를 가르치는 삶으로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에 우리의 권리를 줍니다 오락에, 세상의 가치에, 물질과 권력에 우리의 힘을 줍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그 체계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세속의 가치에 순종함으로 우리는 허무와 절망과 육체의 덧없음을 댓가로 얻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따름으로 우리는 감사와 감격과 다른 삶의 가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이 각박한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까?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나아가기를 주저합니다 아니 그렇게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순종함으로 더 나아가게 됩니다 한번 더 일어서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얻는 은혜중의 은혜는 순종할 때 막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다 보면 막힘이나, 장벽이나, 불행이 우리를 멈추게 못하는 것을 봅니다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더 이상 걸어갈 수 없을 때,  주님앞에 나아와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구할 때,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으니 주님의 도우심을 달라고 항복할 때 그때 우리의 눈은 열리고 삶의 기적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아직 어두워도, 눈이 막혀 답답하여도 주님의 음성이 들리면 실로암으로 걸어 내려가십시오 조금 더 앞으로 순종하여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실로암에서 가슴의 죄를 씻고 불순종의 감정을 씻고 설움과 한을 씻으십시다 장래가 열리고 앞이 보이고 아름다운 세계가 보이게 되는 기적과 같은 일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예배중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힘도 얻고, 지혜도 얻고, 은혜도 받고, 축복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세상이 혼탁하고 가치가 다양해졌습니다 다 각기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혼란이 오고 중병이 들고 하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눈을 뜨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엘리사에게 찾아왔던 문둥병자 나아만장군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깨끗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도 물 떠와서 항아리에 부으며 순종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세상과 세속의 가치에 따르고 순종하시는 것을 바꾸어 하나님의 말씀에, 예배중에 선포되는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이런 은혜를 나누는 일이 시급합니다 때가 어둡습니다 

예수님을 몰라 절망과 원망으로 점철된 인생을 사는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시고 소개하시고 간증하시는 감격적인 삶을 사시게 되길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내 속에서 시작됩니다 

 

해같이 빛나리 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1.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7-12-17 21:12:31 SERMON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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